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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대로 되리라!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8-11-17 (토) 06:17 조회 : 93
설교자 : David Jeon
본문말씀 : 마 15: 21-28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 21-28 )

우리 신앙의 절대적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 하나님은 사랑에 하나님 이십니다.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 보면 하나님에 사랑의 은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안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우리는 은혜 받은자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감사할 것 뿐입니다.

창세기 6장 이하를 보면 노아 홍수 심판으로 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습니다. 홍수 심판에서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생물체도 죽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 세상을 뒤 덮은 물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방주입니다. 노아가 이 방주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함께한 사람들 그리고 그와 함께 방주에 승선한 생명만이 이 심판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유를 창세기 6:8절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다 삼킨 이 홍수 심판에서 살아난 이 구원의 은혜는 창세기 6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 관영한 세상을 그냥 버리고 유기 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고통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고 한탄해 하시며, 근심해 하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서 시작된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 이하를 보면 가나안을 떠나 애굽땅 고센으로 내려간 히브리민족이 430년을 그 곳에서 사는 동안 노예민족으로 전락했습니다.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사는 그 애굽 땅에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그 죽음의 그림자는 한 사람, 한 가정도 놓치지 않는 아주 무서운 죽음의 권세였습니다.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그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 날수 없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신하와 모든 백성 그리고 여종에게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모든 육축에 이르기까지 다 해당되는 그런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뿌린 집은 그 사망의 그림자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장정만 약 60만이 그 사망의 땅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이 피가 뿌려진 가정마다 집마다 사망의 저주에서 보호받아 살아났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피가 바로 흠 없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흘려주신 보혈입니다. 이 은혜의 보혈이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이 보혈의 은혜만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사망가운데서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은혜가 우리 삶에 날마다 흘러 넘처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읽어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나 성령강림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두려움과 염려의 상황에서, 오직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며 약속의 때를 기다리는 120문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그들을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서 구원했습니다. 사명을 회복하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는 칼의 위협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 은혜 안에 있는 이들을 제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삶에 이와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는 인생이 복 있는 인생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인간을 향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 깊은 사랑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무한한 예수 그리스도에 보혈이 구속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의 상황인 광야 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밤낮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것처럼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동행하시는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인생에 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인생에 방황이 끝이 납니다. 그래야 참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육체적 은혜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에게는 흉악한 귀신에 들려, 큰 고통과 괴로움 중에 살아가는 딸이 있습니다. 이런 딸을 둔 엄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여인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여인의 삶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의 삶은 불쌍한 삶이요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28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 여인을 가리켜서 “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이 얼마나 큰 은혜 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소원 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하시면서 이 은혜를 한번 경험해 보셨습니까? 이 은혜에 대한 증거가 있으십니까? 만약 신앙생활하면서 혹시 이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이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가나안 여인입니다. 가나안 사람은 이방인이고 은혜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아주 천한 사람들로 멸시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이 이방인이요,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에게 천대를 받으며 육적으로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라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이 여인도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이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시작-예수님의 찾아오심

오늘 본문에서는 이 여인에게 임한 이 큰 은혜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여기 주목해할 단어가 있습니다. “나가다 ” 라는 말과 “들어가다 ” 라는 말입니다. 이 두 단어가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예수님의 근황을 알려주는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14:34절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 해안인 게네사렛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1절이 말하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게네사렛에서 부터 북서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인 두로까지는 약 40마일(6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시돈은 그곳으로부터 약 20마일(30KM)을 더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두로와 시돈에 가셨습니다. 이 두로와 시돈은 이방인의 “ 부정함 ” 을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영토가 아닌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 큰 은혜를 받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 땅을 떠나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이방 땅 두로아 시돈까지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사는 두로와 시돈에 찾아오시지 않았으면 어찌 이 여인이 예수님께로부터 이와 같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 사건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을 떠나 이 불쌍한 여인의 삶의 현장인 시돈과 두로에 들어오시므로, 이 여인의 삶에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인생가운데 찾아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6-8절에서 인간을 찾아오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말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은 이와 같이 낮아지심입니다. 낮아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겸손입니다. 주님이 이 여인이 사는 두로와 시돈을 찾아와 주시지 않았다면 이 여인이 사는 두로와 시돈에서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되는 천지개벽하는 일이 수 백번 일어날 지라도 그 여인은 은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100년을 넘어 천년을 살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그 여인은 은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14절에 보면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찾아오심에 은혜가 있어야 인생의 삶에는 평화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찾아 오셔서 주님이 함께하신 그 곳이 바로 은혜의 현장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은혜의 시작은 주님이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와 시돈에 들어오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여인을 찾아 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 위해서 인간에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좌 삼으신 곳이 어디 입니까! 성전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를 내 피 값으로 사셨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내 몸이다. 교회는 내 집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은혜가 예비 된 곳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자리가 주님이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음.

이 여인이 예수님께 이 큰 은혜를 받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오셨다는 이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7:25절에 보면 예수님이 게네사렛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오신 소문을 이 여인이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복이 있다. 그래서 듣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이 복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생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사건을 통해서, 수도 없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7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7교회를 향해서 각각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을,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어떤 교회는 책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7교회에게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입니다. 7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마다 이 말씀으로 동일하게 반복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을 듣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 깨닫고 깨닫아야 행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로 전해지는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 들려오는 복된 소식을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게네사렛을 떠나서 이 두로와 시돈까지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바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 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로와 시돈에 오셨다! 라는 이 소식이 전해질 때, 귀에 들려질 때, 바로 이 소식은 예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아멘하고 받았습니다. 얼마나 복된 여인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향해 달려나감

이 여인이 예수님께 이 큰 은혜를 받게 된 세 번째 이유는, 그 소문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 나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이 여인이 자기 동네에 찾아오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했습니다. 즉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듣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달려나와서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는 이 여인의 외침은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 여인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 예수”는 혈루 증으로 고통 하는 사람도, 중풍 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도, 귀신에 들려 물속에나, 불속에 뛰어드는 인생일지라도 고치시고 치료하셔서 자유케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여인은 누군가가 전해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는 순간 그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복되신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 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에 이름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의 이름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고 또 불러야 하는 그 이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이십니다. 복음성가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복된 예수”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에 이름에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가 그 이름에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에 이름을 날마다 불러야 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5절에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도는 성도의 당연한 열매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들을자, 귀있는자가 듣습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주님에게 달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 절함

이 여인이 예수님께 이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네번째 이유, 주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 절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흉악한 환경에서 불쌍하게 살아가는 자기에게 메시야, 인류의 구원자가 찾아 오셨다는 이 소식을 듣자 그는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달려 나왔습니다. 제자들의 뒤에서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여인이 제자들을 앞질러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여인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방인이라는 신분의 문제가 그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멸시가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무시가 그 걸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무관심 같아 보이는 예수님의 반응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이 예수님이 “주 다윗의 자손 예수” 시라는 사실이 그 마음에 자리 잡는 순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녀의 삶의 방향을 예수님께 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25절에 보니까 예수님께 달려와서 절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꿇어 엎드렸다는 말입니다. 여기 엎드렸다 즉 “절하다” 는 동사는 “예배하다”를 의미하는 평범한 말입니다. 미완료 시제로 계속해서 엎드려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 주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던 칭호가 그녀가 예수님을 진정한 경배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확인 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발앞에 꿇어 엎드린 이 여인의 태도는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마음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아는 것에서 시작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기 “절하며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구하는 이 여인의 모습은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예수님이 나의 주되심을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입니다. 그리고 또한 나는 힘없는 자입니다. 나는 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소리 질러 가로되”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소리를 질렀다” 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번 소리 지르고 끝낸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소리 지르고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동하는 것

참된 믿음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에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어찌 소리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 인생에 문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데 어찌 그 곳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 나의 구원자가 내 앞에 서계신데 소리 지르지 않고 부르짖지 않을 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행함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포기가 아니고 인내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까지 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녀의 떡을 개 같은 너에게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셔도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받을 수 없었던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이 여인이 이와 같이 큰 은혜를 예수님께 받을 수 있었던 다섯 번째 이유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다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비록 개가 주인의 아들처럼 상에서는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듯이 지금 저에게는 그런 부스러기라도 필요합니다. 개에게 주어지는 은혜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달려와 엎드려 절하며 도움을 구하는 이 여인은 지금 주님 앞에서 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처럼 여김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위해서는 자기가 개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자기 자신이 개 같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착각입니다. 단지 자기에게는 관대한 잣대를 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잘 보려면 그냥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나를 밝히 보여주는 거울 앞에 서야만 나의 나됨을 알 수 있습니다. 거울이 아니고는 나를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거울로부터 멀리서면 꾀 괸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보지 못하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숨겨졌던 모습이 밝히 드러납니다. 적나라하게 보여 집니다.

이처럼 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은혜의 주체이신 예수님께로 나가는데 제자들이 그녀를 무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셔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엎드려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오해 할 수도, 불평할 수도,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개의 위치로 내려같습니다.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없지만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게 해달라는 갈급한 마음입니다.

온전한 제물과 함께하는 참 예배

구약의 제사에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는 성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제물가운데 짐승의 제물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드시 목을 따서 피를 쏟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목을 자르고 앞발 뒷발을 완전히 잘라 내야 합니다. 그리고 가죽도 완전히 벗겨야 합니다. 그리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완전히 꺼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각을 떠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에서 제단에 올려져야할 제물의 모습니다.

이 제물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제물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물이 되어 제단에 드려지면 그 이전 모습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송아지 제물인지, 양으로 드려진 제물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물은 내가 완전히 죽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물이 되면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존심, 방법, 고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물에게는 하늘에서 응답이 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제물 된 자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뜻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약의 제사인 예배에서도 예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은 살아 있는 예물이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내가 죽어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산 제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삶을 예배자의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 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로 고백하며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린 예배자의 삶입니다.

이 여인의 상한 심령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어머니의 애통하는 절규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마지막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고 있는 이 여인의 심정을 아십니까? 우리에게 이 여인의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산 제물에 모습이 있습니까? 만약 주님 앞에서 이 여인의 마음이 없다면 주님을 주님으로 모르는 마음 아닙니까? 주님 앞에서 이 여인의 마음이 없다면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현상입니다.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여인의 마음

부스러기의 은혜를 구하는 이 여인의 마음이 주님이 찾으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고,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탕자의 마음입니다. 탕자는 돼지가 먹는 것도 먹지 못하는 절대 빈곤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간절한 소원을 같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같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으면, 절대 빈곤이지만, 종으로라도, 아버지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 가지면 거기서부터 회복이 시작 됩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한 번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어도 왜 내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시지 않았느냐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아버지의 은혜와 아버지의 부요가 아무리 커도 그 은혜와 부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의 마음을 가지면 은혜를 받습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습니다. 성전 구석에 쳐 박혀서라도 나는 죄인입니다. 받을 자격 없지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 내가 이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셔야 이 절망과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이 쏟아 질 때 은혜가 임합니다. 회복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이 여인을 향해서 오늘 본문 마지막절인 28절에서는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8절을 다 같이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어갈 제자들에게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여인을 향해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과 2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믿음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역사가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남긴 축복은 “그 시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이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은 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 것.

문제 해결은 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 것뿐입니다. 믿음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라면 부스러기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크신 은혜로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 날마다 나가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성령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믿고, 예수님께 달려 나간 예배자의 마음,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네가 개다 라는 주님의 말씀에 “예 그렇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라는 이 여인의 고백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여인을 향한 주님의 말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 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는 이 말씀이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삶과 가정과 일터와 사역위에 임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