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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 시몬의 집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8-11-13 (화) 06:41 조회 : 31
설교자 : David Jeon
본문말씀 : 막 14:3-9

베다니 시몬의 집 (막 14:3-9) I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마지막 한 주간동안 낮 시간에는 주로 예루살렘 성안에 계셨고, 날이 저물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와 베다니(Bethany)로 가셔서 거기서 매일 밤 유하셨습니다(마 21:17).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매일 밤을 베다니에서 머무셨을까요? 예수님에게 있어서 베다니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예수께서는 마지막 한 주 동안을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셨을까요?

베다니는 주님의 안식처.

베다니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사는 곳입니다(요 11:1).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3남매가 누구입니까? 주님은 예루살렘 성안 사람에게는 배척을 받아야만 하셨지만 성 밖에서도 격리 된 곳인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의 집에서는 언제나 환영을 받으며 지친 몸을 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음 놓고 자기 집처럼 찾아가 부담 없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나사로의 집이 있는 곳이 바로 베다니였습니다(눅 10:38-42).

예수님에게는 여러 제자들도 있었지만, “우리 친구”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실 정도로(요 11:3, 5, 11) 가깝게 지내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 3남매의 집을 가끔 찾아가셔서 식사도 하시고 휴식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 성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베다니는 본래 슬픔의 집.

베다니는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로 예루살렘에서는 5리(약 3.2㎞)정도 떨어져 있습니다(요 11:18). 이름의 뜻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집' 또는 ‘슬픔의 집’이란 의미가 보여주듯이 베다니는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나 죄인들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하류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문둥병은 하늘이 내린 벌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질병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병이 나병(문둥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병자들은 그 사회로부터 격리를 당하였고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의 율법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레 13-14장; 마 15:3).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규정에 따라 나병환자들은 예루살렘 성안에 함께 거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추방을 당해 성문 밖에서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런 곳에 가고 싶어 하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조차 없을 이곳을, 그런데 예수님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도시 예루살렘 안에는 화려한 숙소, 가볼만 한 명소도 많이 있었겠지만, 그런데 예수님은 오로지 이곳만 방문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즐겨 찾으셨던 주님에게 있어서는 매력 있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던 이곳을 생명이 있는 곳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마을 사람인 시몬의 나병을 깨끗이 고쳐 주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는 항상 예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곳.

행 1:21에는 예수님의 승천의 장소를 감람산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다니는 바로 이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을 들은 곳이기도 합니다. 눅 24:50-53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베다니는 잔치가 있는 곳.

요 12:1-2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예수께서 베다니를 방문하시자 베다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열렸지만, 잔치 준비는 동네 여러 사람들이 달려와서(요 12:2) 함께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성경에서 잔치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배하면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삶을 살고 있어도 정성과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들,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 최고의 것을 주님께 쏟아 붓고도 감격하는 그런 참된 예배자들이 모여 있는 좋은 동네가 바로 베다니였습니다. 조그마한 것 행하고도 대가를 기대하고 사는, 네 것 내 것 철저히 따지며 선을 긋고 긴장감과 경계심으로 살아가는, 비방과 원망으로 늘 갈등을 조성해 가는, 많은 것을 받았어도 한 번의 고마움도 가지지 못하는,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높아지려는 사람들만이 우글거리는, 예루살렘성 안의 사람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베다니와 나병환자 시몬의 집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형으로,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닮기를 지향해야 하는 모델이 됩니다. 또 시몬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아름다운 일은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래서 예수께서 정말 머물기 원하시는 그런 곳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몬의 집은 베다니 교회

저는 예수님이 계신 베다니와 시몬의 집을 ‘베다니교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베다니교회 성도들은 누구일까요? 또 이 교회 안에 누가 있나요? 여러 명의 베다니교회 성도들의 이름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나병환자 시몬, 나사로와 마르다(요12:2), 마리아, 가룟 유다(요 12:4)와 다른 제자들(마 26:8) 등등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님이 이 교회 안에 계신 가운데 작은 일이지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일이 한가지 발생했습니다. 이 일은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이기에 절대로 가볍게 여기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나병환자 시몬과 마리아와 가룟 유다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이 문제에 접근하면서 또한 올바른 성도의 모습을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1. 나병환자 시몬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3절상) 주님을 위한 잔치가 열린 곳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의 ‘시몬’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별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편했다고 합니다. 시몬이란 이름은 NT에만도 약 10회 가량 나옵니다. 그 가운데 복음서에는 3사람의 시몬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시몬 베드로>입니다(눅 5:1-11). 그는 어부였습니다. 지금이야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다 소중하고 존중받지만, 사실 그 당시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인식으로는 어부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종사하는 직업 가운데 하나이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그는 갈릴리 바다의 보잘 것 없는 어부였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두운 밤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 곧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지요.

두 번째는,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막 15:21). 그는 아프리카 북부 지방인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별 볼일 없는 촌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만나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세 번째는, 바로 본문에 나오는 <베다니 시몬>입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그 당시의 나병환자는 가장 저주받은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을 영접한 후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저주받은 삶에서 축복받은 삶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나병환자 시몬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집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과 함께 먹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때에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 혼인 잔치에 참예할 자의 모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3명의 시몬은, 처음에는 하나같이 별 볼일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특별한 존재로 그들의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만난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병환자 시몬은 처음에는 저주받은 죄인이었지만 죄 사함을 받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3명의 시몬은 참 성도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나오는 이 시몬을 보면 참으로 은혜가 됩니다. 그는 본래 나병에 걸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지내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그 불치의 병을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을 예수님을 통해 체험하고 새로운 몸을 얻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시몬은 예수님의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해도 부족한 일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주님의 은혜를 보답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도무지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예수님을 초대하여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원망과 불평에서 감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말로만의 감사가 아니라 반드시 정성과 희생이 따르는 감사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주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까? 감사한 마음엔 언제나 기쁨과 화평이 깃들게 됩니다. 같은 병을 앓아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치료를 받는 사람이,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을 말하는 사람 보다 훨씬 일찍 퇴원하게 된다는 임상결과도 있습니다. 이렇게 참 신앙인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2. 마리아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평소 예수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자기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것은 당시 그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귀한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 향유는 인도의 히말라야에서 자라는 ‘나드’라는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채취한 것으로, 값으로 치자면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모아야 할 만큼의 적지 않은 돈입니다. 당시 화폐 가치로 따지자면 3백 데나리온은 주어야 살 수 있는 값비싸고 귀한 명품 향수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아마 결혼할 때 쓰기 위해서 마련해 두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결혼할 때 자기 몸을 단장하고, 첫날밤을 비롯하여 신혼 시절에 사용하기 위해 향유를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나드 향유를 예수께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들고 예수님이 계신 곳,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사하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마리아는 식사중인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 병, 즉 옥합의 뚜껑을 열고 천천히 부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만큼 소중한 분으로 그의 인생에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깨닫고 체험했기에 그것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그것보다도 더 비싼 것이 있었다면 깨뜨려 주님을 맞이하고 영접하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 거룩한 의식이 있습니다. 대부분 감람나무 기름을 머리에 붓는데, 이 의식은 이스라엘 왕의 취임식 때 행해지는 예식입니다. 또 제사장의 임명식 때 행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 이 의식을 거행합니다.

마리아가 어떤 의미로 예수님의 머리에 나드 향유를 부었을까요? “예수님, 나의 왕이십니다.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저는 믿고 의지하며, 깊이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마리아가 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뿐만 아니고 발에도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주님의 발을 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이런 방법으로 환영합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입을 맞추거나, 발을 씻겨 주거나, 향을 피우고 합니다.  더구나 자기 머리를 풀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 이것은 엄청난 섬김입니다. 유대인 여성이 남들 앞에 머리를 보이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는데 하물며 자신의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순정, 순결, 지조 모든 사랑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마리아는 “주님, 저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라고 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옥합이란 옥으로 만든 나드 향유가 담긴 뚜껑이 있는 달린 작은 그릇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옥합을 깨뜨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깨뜨림은 전부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용할 때 한두 방울 뿌리는 것이 향유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그 안에 들어있는 향유 전부를 부었습니다. 깨어진 옥합에 향유가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Complete Offering). 자신이 믿고 따르는 대상을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최대의 가치를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만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쓰지 않았습니다. 주님만을 섬기고 싶은 감동된 마음이 있어서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섬길 대상은 주님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서 헌신하고 경배할 대상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선 나의 것, 가족의 것부터 생각한 다음에 주님을 위해 사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귀한 것들이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만을 위하여 써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기쁘고 가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러한 자세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축복된 감동입니다.


마리아가 이러한 섬김이 가능했던 것 - 사랑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300데나리온이나 나가는 비싼 향유를 옥합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만큼 신앙을 성장시키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게 자라갑니다. 아름다운 믿음으로 자랍니다. 충성하는 믿음으로 자랍니다. 감사하고 감격하는 믿음으로 자라납니다. 영원히 죄에서 멸망할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옥합은 자연히 깨뜨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삶입니다.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자

눅 10:39에서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이어 42절에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그녀는 주님의 발아래에서 주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일을 우선으로 여기며 힘썼습니다. 생애 최대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의 비밀입니다. 최고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최선의 편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롬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받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제자들과 가룟 유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4)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는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분을 내어 마리아를 책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본문에는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고 그저 “어떤 사람들”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 26:8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 12:4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데,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즉 “가룟 유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그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 12:6)

제자들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인데 제자들은 주님께 헌신하는 마리아를 오히려 책망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봉사하지 않으면서, 헌신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주님께 봉사 헌신하는 사람을 시기 질투하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누가요? 제자들이.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서 이 일에 선봉에 서서 누구보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누구입니까? 그는 격정적인 요한이나 의심 많은 도마나 성격 급하고 충동적인 베드로보다 치밀하고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이기에 다른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회계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롯 유다는 그 여인의 행위를 책망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 듯합니다. 스스로 주님의 뜻을 마리아보다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요 12:6은 그에게 대해서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이런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특징짓는다면, 남이 하는 일을 보고 의로운 척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존재를 가치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분으로 믿었지만,  가룟 유다를 포함해서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을 생각지 않고 돈의 문제로 따지며 선한 척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따라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이런 식이 될 때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언제 부터인지 예수님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바리새인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또한 가룟 유다는 입으로만 하는 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회계의 임무까지 맡았지만, 마침내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30에 팔기까지 한 배은망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가롯 유다였기에 그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타산적인 성격의 사람이었기에 진정한 사랑의 발로로 드리는 것에까지 금전적인 계산을 끌어드렸습니다.

은혜는 ‘계산할 수도 없고, 갚을 수도 없는 빚’

은혜라고 하는 것은 ‘계산할 수도 없고, 갚을 수도 없는 빚’입니다. 세상의 물질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계산이 앞선다는 것은 은혜를 받지 못했던가 혹은 받았지만 아직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에는 환경과 여건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봉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저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와 봉사의 자세입니다. 가롯 유다가 말하는 소리를 한번 들어보세요. 얼핏 생각하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의 소리로 그러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의 속셈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향유를 팔아서 돈으로 자기 수중에 들어오면 그것을 슬쩍 도적질 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성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지금 주님을 위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체 하는 자였습니다. 봉사자가 아니라, 주님을 팔 기회를 찾는 간교한 자요, 다른 사람이 하는 봉사까지 막고 다니는 자입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잘 하는 사람까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이었습니다. 자신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판결

마리아가 한 일을 두고 가룟 유다를 비롯해 이렇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자 예수님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1. “가만 두라.”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주님은 먼저 마리아가 한 일을 “좋은 일”(a good work)라고 하셨습니다. 표준새번역이나 NIV에는 "아름다운 일"(a beautiful thing)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왜 이 일이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일일까요? 비싼 향유를 사용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8절에 보면 "저가 힘을 다하여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이제 곧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마리아가 얼마만큼 구체적으로 미리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아가 행한 주님 섬김은 결과적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마리아를 보면서 너무도 흡족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데만 온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에 가장 큰 성공과 행복은 내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학문도, 명예도, 물질도 가문도 포기했습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할 때 하나님은 더 좋고 귀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도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사실 마리아도 주님과의 만남이 마지막인지 몰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를 이렇게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2) “그를 기억하리라”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세상에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한 행동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어디서나 기억되어져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복음전파와 함께 마리아의 이 신앙을 간증하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성숙하고 참된 신앙의 표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표본을 본 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고와 헌신과 봉사를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기억하십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고 병자가 고침 받고, 아픈 자가 치유 받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역사가 있는 곳, 그리고 순수한 사람들의 헌신과 사랑과 정, 감사와 돌봄이 넘치는 베다니의 모습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리아는 입으로만, 머리로만 말하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온전한 헌신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가 베다니교회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아름답고 참된 모습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