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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8-11-10 (토) 06:29 조회 : 62
설교자 : David Jeon
본문말씀 : 시 122:1-9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시 122:1-9)

성막(tabernacle)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목적이 무엇일까요? 출 3:18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즉 출애굽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만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는 성전입니다. 성막은 이동이 잦았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쉽게 옮길 수 있도록 천과 나무 등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성막은 구약의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신약의 히브리서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막은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상징하고,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냅니다. 그리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밟아가야 하는지, 구원의 전 과정이 이 성막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막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집니다.

1)성막(聖幕):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천막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그분이 계신 곳은 매우 성스럽고 거룩한 예배 장소라는 뜻입니다. 2)회막(會幕): 회집(會集)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장막, 집, 천막 즉 교제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3)여호와의 장막(帳幕): 하나님이 계신 처소(천막)란 뜻입니다. 4)법막(法幕):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가지고 다스리시고 법궤가 있는 곳이란 뜻에서 법의 막, 증거의 천막이라고 불렀습니다. 5)여호와의 전: 여호와의 집 또는 궁전(宮殿)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막의 정의와 역할

첫째, 성막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출 25:8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은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성막을 통해 죄인된 우리를 만나주시고 자신을 보여 주시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성막은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들이 애굽에서 종되어 살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하여 마음컷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허락하시고 그곳에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인간의 창조목적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세 번째, 성막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장소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죄인의 모습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며 빛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죄인과 불의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사탄의 주관을 받으며 결국 사후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따라서 죄인은 자신의 죄를  흠(죄) 없는 어린양에게 전가해 대신 벌을 받게 하고 양의 피로써 자신의 죄을 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대신한 제물을 통해 죄인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곳입니다. 성막의 이러한 기능 때문에, 성막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 또는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성막은 아주 세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입니다.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100규빗(45.6m)이고 너비가 50규빗(22.8m)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막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앙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3개 지파씩 나누어 진을 치며 살았습니다. 동쪽에는 유다, 앗사갈, 스불론 지파. 서쪽에는 에프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 북쪽에는 단, 납달리, 아셀 지파가 각각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진을 쳤습니다(민 2:1-34). 그리고 레위 지파는 성막 봉사를 전담하는 임무를 맡겨서 4등분하여 각 진에 배치되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도록 하심

첫째,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삶을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를 중심으로 살아가야만 되듯 모든 피조물들은,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中心)으로 살아가야 함을 가리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의 공동체 삶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삶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제사장) 즉 주의 종들을 중심한 공동체 삶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각 지파별로 하나가 되는 공동심과 협력하는 삶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200만이나 되는 민족이지만 체계적으로 잘 조직화되면 사랑과 화합된 삶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훈련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체에서 이탈되면 절대로 생존할 수 없다는 법칙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중에는 성막을 주시고 가나안 땅에서는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이 예수님 이후에는 교회로 변화되어 오늘날의 교회가 구약의 성막과 성전을 대신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꿈이요 희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바로 이 성전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이요, 국가의 모든 분야의 핵심이고, 여호와 신앙의 본거지가 된 것입니다.

행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광야 생활은 ‘광야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광야교회의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광야 교회의 성도들은 광야 40년동안 교회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성막은 백성들의 진 한 가운데 놓였습니다. 이것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을 때만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성막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였고, 성막이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서 1달이든 2달이든, 1년이든 2년이든 성막과 함께 머물렀던 것입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진행된 광야 교회 성도들에 대한 훈련과 교육은 온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고 교훈이며, 성막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삶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삶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모든 인간 사회는 바로 교회(하나님, 예수님)을 중심으로 삶의 장(場)을 진쳐야 합니다. 성도들의 모든 삶의 방향과 목적은 오직 교회가 되어야 함을 성막은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시편 150편 전체가운데 성전을 향한 노래 혹은 성전순례시가 모두 15편(120~134편)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를 위한 찬양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다윗의 신앙고백이 잘 나타나고 있는 시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모든 삶의 중심이 되게 하라. 항상 교회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라”는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항상 교회중심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을 향해 늘 올라가는 신앙

지형적으로 보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정도 떨어졌고, 해발 927m로 팔레스틴에서 최고로 높은 지역인 헤브론 방향을 제외하고는 어느 쪽에서든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올라가자고 하는 것은 지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라고 하는 말씀을 지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영적 의미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존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계신 성전을 향해 늘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광야 교회의 성도들은 광야 40년을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살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중심(中心)으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함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해면 하 250m의 저지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1000m 높이의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음)로 내려가는 것은 가파르기도 하고 암석도 많아 길이 험합니다. 또한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여 예수님의 비유에도 등장을 합니다. 따라서 주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은 성전 지향적, 하나님 지향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로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세상 지향적, 멸망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와 함께 시작되어 교회와 함께 진행되다 교회와 함께 끝납니다. 교회에 나옴으로써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주시고 불러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며 천국을 향하여 충성하다가 교회 안에서 그 생애를 마침으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한가운데는 항상 교회가 있습니다. 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항상 주님의 전인 교회를 향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왜 항상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교회를 향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가?

대하 7:16-15에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즉 교회에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언제나 교회를 향해 있기를 축복합니다. 낮이든 밤이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교회로 달려 나와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분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집에는 용서가 있고 자비와 사랑이 있습니다. 교회는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바르게 파악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축복의 문을 열어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세우신 유일한 구원의 기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이 교회에 귀착되고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이 당연히 교회 중심적인 삶의 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삶을 위하여 항상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삶, 교회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교회중심으로, 늘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를 위하는 삶이 되어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항상 교회를 위하고 교회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늘 마음이 교회로 향해 있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본문은 그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에 가기를 기뻐합니다.

1-2절 :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누군가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라고 했을 때 다윗은 기뻤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 한마디에 기뻐했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이 성전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모함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갈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 그때가 되어 올라가게 된 기쁨,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떠나 있던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사람의 기쁨의 모습이고, 사랑하는 연인을 빨리 보고 싶은 사람의 마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소유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 기쁨으로 충만한 다윗처럼, 교회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가슴 벅찬 기쁨과 사모함으로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에 오는 시간이 30분정도 걸린다면 30분내내, 한 시간이 걸린다면 한 시간내내, 만일 집과 교회를 오가느라 하루 전체가 소요되었다면 그 시간내내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은혜와 기쁨으로 충만해지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주일이 기다려지고 주일을 사모하게 되는 마음이 마치 첫 사랑을 만나는 처럼 설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성전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하는 말을 듣고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요? 바로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말에 너무나 반갑고 즐겁고 기쁜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예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예배만 생각해도 벅찬 감격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예배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다윗의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건물은 공간 위에 지어지는 것이지 건물 위에 공간이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공간과 건물은 하나입니다. 분리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공간이지 건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그분의 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함께 계셨고 그 성을 자신의 성읍으로 삼으시고 친히 통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함께 계셨고 그 성을 자신의 성읍으로 삼으로시고 친히 통치하셨습니다.

친구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감격해 하고 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가 참된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안에 발을 들어놓고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장중 안에 기초하고 서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 개인의 삶의 성패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기초로 하여 어디에 서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 안에 있어야 합니다. 즉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에 있게 하신 것을 기뻐하십시오. 감격하십시오. 감사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 감사의 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4절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는 다윗의 눈에는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도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즉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교회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교회를 사모하며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다윗은 감격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일주일의 삶을 감사하고, 우리의 매일의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낮의 해와 밤의 달에서 지켜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시 136:2에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이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만 우리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감사의 반대는 불평, 불만, 원망,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기뻐지고, 또 사람도 반가워집니다. 만날수록 기뻐지고 사랑스럽고 항상 모든 일에 사랑과 믿음이 더 돈독해집니다. 그러나 미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면 마음에 반가움은커녕 볼수록 싫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의 공동체를 주신 것, 또 내가 이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4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은혜를 받고 있음을 느낄수 있습니다. 각 지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나와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향해 기뻐하며 오는 사람은 그 마음에 사랑이 넘쳐흘러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나와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미워지고 싸우고 혈기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덜 사랑하거나 아니면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설사 미워하는 대상은 극소수이고 사랑하는 대상은 훨씬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작은 사람들 때문에 몇 배 더 많은 이들을 향한 기쁨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지파들이 …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는 말씀처럼 공동체 속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교회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같이 참여해서 목소리를 높여 찬양하고, 같이 신앙고백하고 기도한다면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3. 교회의 평안을 구합니다.

6절상반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Jerusalem)이라고 이름은 ‘터, 기초 또는 기초를 둠’의 뜻을 가진 ‘예루’와 ‘평화’에 해당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진 ‘살렘’ (shalem)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의미는 ‘평화의 도시’, ‘평화의 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도성은 원래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다스리는 땅이 아니었지요. 천연요새지인 예루살렘 도성은 여부스라고 하는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족속으로 우상숭배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는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지 못했지만, 다윗이 왕이 되고나서 그들을 항복시키고 그곳에 법궤를 옮기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도성이 되게 했습니다.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많은 전쟁과 갈등으로 아픔을 겪은 곳입니다. 예루살렘이 공격당하고 수치를 당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각자의 삶에서도 공격당하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안전과 평화는 곧 이스라엘 개개인의 안전과 평화와 직결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영혼의 지성소가 평화로워야 우리 인생이 평화롭습니다. 내가 예배하고 교제를 나누는 교회 공동체에 샬롬이 임할 때 우리 가정에도 샬롬이 임하는 것입니다. 늘 교회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전을 평안케 하는 사람입니다. 마 5:9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 속에서 서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화평이 없고 분쟁과 시기, 싸움,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행위가 아니지요.

4. 교회를 위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6절하반절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기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면서 교회를 더욱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해야할 대상을 사랑하면 복된 자가 되고 사랑해선 안될 대상을 사랑하면 불행한 자가 됩니다. 교회는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마르다는 덜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나 둘 다 똑같이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부엌에서 일했던 마르다나 주님의 발 아래에서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는 동일한 것입니다. 단지 문제는 마르다는 좀 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주함 때문에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그곳에 절대적인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합시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사랑합시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을 사랑해 봅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과 인생에 평강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십시오.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두가지 축복

형통의 복

첫째, 형통의 복입니다. 6절하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여러분! 교회 출입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교회를 평안케 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형통이란 ‘번성’ ‘안전’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써 실패와 반대말입니다. 즉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는 실패를 모르는 자로서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형통이란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되는 것이 되게 되고, 없는 것이 있게 되고, 작은 것이 크게 번창하고, 일이 잘 되고, 점점 더 많아지고 창대해집니다.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형통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

계획하는 일이 잘 되면 얼마나 기쁩니까? 모든 일이 다 잘 되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뜻하는 일이 잘 안 되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불통하고 잘 안 되면 아픔과 고통은 너무 큽니다. 심장이 터지고 피가 멈추는 절망적인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여 헌신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부흥과 확장을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을 향해 축복의 약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8:29-30).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깝지 않게 내어 놓을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하시며 말씀하신 확실한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긴다면 형통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헌신과 희생은 없고 축복과 은혜만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신앙인으로 넘쳐나진 않습니까?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성도들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되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 명령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성도가 진심으로 충성하며 흘리는 땀방울 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어 쇠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실패하지 않는 형통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부디 영적 통로인 교회를 사랑하고 섬김으로 형통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날로 날로 많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평강의 복

평강의 복을 주십니다. 7절에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법칙이요, 진리입니다. 우리 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평을 심으면 의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열매를 거두게 되고,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그 기쁨이 배나 더 임하게 됩니다. 교회의 평안을 위해 기도와 수고의 땀방울 흘리기를 기뻐하면 평강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9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교회중심의 삶은 영혼과 범사와 강건의 균형적인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복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좋은 나무로부터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학생은 점수보다는 공부에 더 힘써야 합니다. 직장인이 승진보다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응답보다는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점수와 승진과 응답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복 받는 마음과 삶과 신앙에 최선을 다하면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면 구한 것은 물론이고 구하지 않은 복까지 하늘 문을 여시고 부어 주십니다.

맺음말.

성막에서 성전으로, 성전에서 교회로 그 모습은 크게 달라졌지만 그 속에 흐르는 ‘모든 성도들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오직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광야 교회 성도들이 성막을 중심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의 중심은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중심이 바로 하나님 중심이고 예수님 중심입니다.

늘 하나님 전을 향해 올라가는 신앙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늘 주의 전을 찾는 일을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교회의 평안을 구하고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과 범사에 강건의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