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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굴의 자리를 통과하라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8-10-31 (수) 05:43 조회 : 10
설교자 : David Jeon
본문말씀 : 욘 1:17-2:10

기도굴의 자리를 통과하라 (욘 1:17-2:10)

불순종의 삶에서, 순종의 삶으로 돌이키려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잔털과 찌꺼기까지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사명 없이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확실히 돌아서야 합니다. 어중 간하게 돌아서거나 사람을 따라가다가는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확실히 바다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든 살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할 때 하나님은 죽이지 않습니다. 살려주십니다.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그 물고기의 배속에서 3일 3야를 그 속에 머물게 하시면서 요나의 삶의 중심을 바꾸고 회복시키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며 잘 사는 것보다, 오히려 순종하며 고생하기를 작정할 때,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길이 우리앞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회복되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복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2장에 나오는 ‘회개의 기도’가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한 회복은 회개의 기도굴을 통과함으로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I.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도하십시오.

1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1장 3절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10절에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므로...’ 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대면하여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음을 봅니다. 1장에 보면 선원들의 기도는 있어도, 요나의 기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 요나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2:1)." 이처럼 물고기 뱃속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도하게 만드는 기도의 굴이 되는 곳입니다. 삶의 회복과 축복의 첫 시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얼굴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삶이 온전한 축복을 맛봅니다. 회개를 하면서도, 매 맞기 위해 선생님께 불려나가는 아이의 심정이면 안됩니다. 참 회개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찾으시는 줄을 알고 멀리 가고 싶어도 도저히 갈 수 없음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입이 열려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대부분 회개란 내가 주님을 찾아가서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상 내가 회개하고 싶다고 회개가 진지하게 되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물도 흘리고 싶고, 또 마음껏 통곡도 하고 싶은데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요나처럼 주님이 먼저 나를 찾으실 때, 그것을 앎으로 가능합니다. 회개는 내가 내 맘을 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나에게 주실 때 그제서야 우리는 마음을 열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요나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큰 물고기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비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지명하다, 명령하다’를 의미합니다. 무엇입니까?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그 때 그 물고기가 바로 그곳에 있도록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인생의 풍랑과 고난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절대 주권가운데 있음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게 되고. 은혜 앞에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살리시든 죽이시든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인 뜻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길 때, 하나님은 예비하신 은혜의 물고기를 통해서 연약한 인생과 만나주시고 새롭게 사명을 회복하십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바다에 던져진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물고기를 예비하셨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요나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 징계의 의를 인정하며 기도하십시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요나는 고통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인 스올의 뱃속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요나가 처한 장소는 마치 죽은 자들이 처한 자리와 같았지만, 하나님은 회개하며 외친 그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왜요? 마음에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스올의 고통과 공동묘지와 같은 고통임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징계의 의를 인정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8). 여기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가리킵니다. 마치 자기가 은혜를 버리고 떠난 것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우상숭배와도 같았음을 회개하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나?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6)./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2:9) /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신 분이 선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의 처지가 사고로 인한 것이었다면, 정말로 두려웠을 것입니다. 요나는 그의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도발의 결과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친히 징벌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즉 그를 바다에 집어넣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요나는 그가 한때 근심하게 하였던 바로 그 분에게 기도가운데 본능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참된 회개의 때 회복의 시기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는 장본인이 내 탓임을 깨달을 때입니다. 요나와 같이, 사람은 자신이 받아야 할 징계의 의를 인정하고 또 그 자신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자각할 때,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비록 풍랑 이는 바닷 속의 물고기 뱃속이었지만 회복의 도상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관계중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요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무엇입니까? 관계를 전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2).여기 2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와 ‘주께서’입니다. 본문 2절에도 "내가… 주께서…"가 2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3절에 ‘주께서’가 나오고, 4절에 ‘내가’가 나옵니다. 6절에 또 ‘내가’와 ‘주께서’가 나옵니다. 7절에 ‘내가’와 ‘주께’가 나오고, 마지막 9절에 ‘나는 주께’가 나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니 주께서 어떻게 하셨다. 주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시니 내가 어떻게 되었다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하며 교제하는 관계성을 잘 보여줍니다. 기도는 마치 우리의 생각을 쏟아 붇기만 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 형편을 조근 조근 아뢰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부모는 자녀를 돌보는 것도 결국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때문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관계가 복원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고아처럼 스스로 갈 길을 갔지만,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는 관계회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 2장에서 요나의 기도를 잘 살펴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꺼내달라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지금 요나의 기도의 목적이 고통을 없애는 것에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회개 기도가운데 중요한 것은 현재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대하는 기도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문제와 환경을 만나면 회개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가지고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자의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고통이 해결되면, 또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고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같은 제목으로 계속 반복해서 실수, 죄, 회개를 반복한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한 회개의 기도는 고통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만 불러도 따뜻한 관계가 회복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요구하고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의 소통이 원활하면 이해될 일들이 오해로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관계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교통을 통해서 모든 불신과 원망이 제거됩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강조했습니다. “제발 기도해라! 기도하지 않을 때, 세상의 소리와 문제자체에 집착하여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관계의 문제임을 알게 되며, 더욱 깊이 기도하다보면 나와 저 사람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문제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부사이에도 가끔씩 어떤 문제자체를 가지고 격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할 때, 변화되지 못한 자신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요구하시는 것은 문제와 고통의 해결이 아닌,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고통만을 바라보지 말고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에 그 고통은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IV. 거룩한 성전을 중심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예비하신 물고기 뱃속이 요나에게는 기도의 처소이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0절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토하여 지게 됨은, 새로운 사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영원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 영원한 회복을 위한 전환점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주의 성전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때의 상황을 가지고 영상을 만든다면 어떤 상황이겠습니까?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때 바다의 표면에 닿기 전에 물고기가 점프를 해서 요나를 덥석 삼켰을까? 아니면, 요나가 바다 표면 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물고기와 와서 그를 삼켰을까? 둘 다 아닙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본문 3절에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 그래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다”고 했습니다. 아직 요나가 물 표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5절에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2:5)." 여기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깊음이 나를 에웠고 심지어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다고 말합니다. 미역, 다시마, 해초.... 이것은 이제 요나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아직은 숨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봅시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 이것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바다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다’는 그는 암초 사이에 끼였던 것 같습니다. 꼼짝 못하는 상황, 숨을 쉴 수 없는 죽음의 상황속에 있었습니다.

6절에,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그의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초죽음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려주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차려보니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물고기 뱃속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때, 그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7절에 "내 영혼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그는 굉장한 영적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육체의 고통의 극에 달하면, 남은 힘을 모조리 사용하고 나면, 더 버틸 능력이 없는 순간에 무엇을 경험합니까? 육체적인 피곤의 끝에 믿는 자는 영적 갈급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영적 피곤함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사모하는 동기가 됩니다. 우리 영혼은 피곤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육신은 먹어야 힘이 생기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 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큰 질병, 큰 사고를 당하거나, 범죄하거나, 실패했을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일 것이며 구원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할 것입니다. 죽은 고래는 떠내려가도 살아있는 피라미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나면 어쩔 줄을 몰라 날뜁니다. 하지만,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어떻게 되는가? 더 미친 듯이 날뜀니다. 왜요? 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생명이 있는 영혼은 살기 위해 이런 몸부림을 치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이런 몸부림이 없다면 그건 그 영혼이 죽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입니다.

그 영혼의 가장 갈급한 몸부림의 순간에 택한 백성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주의 성전을 생각, 주의 교회를 생각하고, 그 성전에서 목 놓아 찬송과 기도하던 때를 그리워 합니다. 신앙의 방황 곧 영적인 방황 중에 세상을 향해 나아가보신 분들의 경험입니다. 돈있고 힘 있으면 모릅니다. 쥐엄 열매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때가 도래하면 아버지 집, 주의 성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본문 4절과 7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2:4)." / “주의 목전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나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2:7)

특별히 고난 중에 주님의 교회에서 완전한 회개의 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를 지냈습니다. 3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완전함과 영원함입니다. 완전한 회개를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고난의 태풍이 몰아칠 때, 사람을 도움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곧장 주의 성전, 주님의 몸된 교회로 달려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철야하며,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가운데 숨어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하기 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매어달리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 3야를 있었듯이, 교회에서는 회개와 통곡의 눈물가운데 완전히 죽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회개와 통곡의 눈물가운데 완전히 죽는 것이 뒤따를 때, 그것이 온전히 사는 길이 됩니다.

고난 중에 다른 곳을 찾지 마십시오. 주님의 교회에서 기도의 제물이 되시기를 바람. 온전히 주님의 성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들을 것을 듣게 하시고, 돌이킬 것을 돌이키게 하시고, 사명을 회복시켜 기쁘고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새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며 새로운 은혜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시편119편 71절에 말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함이라.” 요나는 불순종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제 전혀 새로운 믿음의 삶의 회복을 시작했습니다. 회복의 신앙과 삶은 물고기 뱃 속같은 기도의 장소,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기도굴의 자리를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바로 그곳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교회생활을 벗어버리고, 물고기 뱃속의 요나처럼 간절함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고난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깨달아 알고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귀한 사명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I.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도하십시오.
II. 징계의 의를 인정하며 기도하십시오.
III. 관계중심으로 기도하십시오.
IV. 거룩한 성전을 중심으로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