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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온전히 세워감으로, 주님과 영원한 안식을 예비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8-10-30 (화) 05:52 조회 : 15
설교자 : David Jeon
본문말씀 : 룻4:16-23

교회를 온전히 세워감으로, 주님과 영원한 안식을 예비(룻4:16-23)


본문에서 룻이 낳은 아들에 관한 설명을 성경은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의미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성경은 룻기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22절까지 족보를 연속해서 기록합니다.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18-22).”

오벳을 말하면서 룻기의 마지막에 다윗 가문의 족보를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의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의 왕의 존재입니다. 이것은 룻기가 하나님앞에서 완전하지 못했던 사사시대를
정리하고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를 바라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와 룻, 왕정시대와 다윗 : 회복과 장래의 영광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기대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사시대에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엘리멜렉 가정의 실패가 한 이방여인 룻의 믿음의 결단을 통해 회복됨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를 회복하였듯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온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샘플로 뽑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백성들을 복주시며, 그렇지 않을 경우 심판하시는 형통의 원리를 드러내시듯이, 지금 이스라엘에게 그와 같은 것을 엘리멜렉가정을 통해 보이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4-6a)

사사시대를 회복하고 장래의 하나님을 왕 삼은 백성들의 장래의 영광을 보라는 것입니다. 회복된 엘리멜렉의가정처럼, 너희의 모든 죄악과 소견에 옳게 행했던 모든 것을 씻어내라는 것입니다.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왕인 다윗을 언급하심으로, 저들이 왕이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므로 소망있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 영원한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두 번째,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의 의미는 이 다윗이 상징하는 우주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연결이 되는 장래의 소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룻기서의 결론부분에서 다윗을 통하여 영원한 왕, 생명의왕, 구속의 주님에 대한 예표를 보이심으로, 장래에 나타날 영원한 소망을 회복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그러하셧듯이,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향해 사사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돌이키는 사역을 계속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늘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은 늘 또 다른 사사들을 보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의 악순환의 반복은 사사시대의 일이면서, 동시에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지금 이 시대가운데도 계속해서 되어지는 일들입니다.

사사시대를 통해, 철저하게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실패한 엘리멜렉의 가정을 회복시키면서 다윗을 마지막에 소망의 대상으로 보여주듯이,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못하고 소견에 옳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의 모든인류에게 지금은 다시 오실 영원한 왕을 기대하며, 현재의 삶 가운데서 주님안에 나타나는 완전한 회복을 맛보고 기대하고 바라보며 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회복된 룻과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미래를 예비하고 보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회복이 있는 곳에는 늘 미래가 잉태되는 은혜가 존재

회복이 있는 곳에는 늘 미래가 잉태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장래의 소망과 영광이 함께 존재합니다. 아무리 현재가 좋아도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살 소망이 없다면 현재의 좋음이 의미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현재의 어려움이 있어도 확실한 미래의 증거가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와 같은 절망의 가정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왔을 때, 왕이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듯, 죄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사사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왕을 준비하시듯, 하나님은 오늘날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왕으로 회복하는 자들에게 이 막막한 죄악된 시대를 끝내고, 완전한 왕이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소망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소망을 가져다 주며, 그 소망은 반드시 영원한 왕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아이-오벳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룻이 나은 그 아이를 왜 나오미의 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또 그 낳은 아이의 이름을무엇이라고 지어줍니까? 나오미는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이를 품에 품고 그 아이를 양육하였습니다. 그 여인들은 그 아이를 보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합니다. 룻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룻의 아들이 아니고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여인들이 부르는 이 이름이 하나님이 지어주신정확한 이름입니다.

그 아이는 룻의 아이가 아니라 나오미의 아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의 원리와 제도를 통해 낳은 아이였기 때문에 보아스 가문이 아닌, 엘리멜렉 가문의 아이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인들이 룻의 아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나오미의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인간적으로 보기에 엘리멜렉의 대는 끊어질 수밖에 없었고, 나오미와 이방 며느리의 삶 또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 바라보고 살겠다는 나오미와 룻에게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출신을 묻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장래의 소망을 주심의 증거로 아이를 주신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처음 나오미의 모습을 보면서 ‘이가 나오미냐?’ 고 하였는데,지금은 ‘나오미의 아이다’라고 합니다. 생명을 주관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편을 통해 며느리 룻에게 믿음을 주시고, 친족 보아스를 만나게 해 주셔서 엘리멜렉의 대가 이어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회복과 기적의 주인공 나오미가 아이의 양육자가 되어 그 아이를 기르자 동네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를 찾아와 ‘나오미의 아이’라고 하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오벳’ 이라고 지어줍니다.

오벳이라는 말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 아이를 설명하기를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오벳을 종으로 다윗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아이가 엘리멜렉의 가문이 쇠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시대을 이어주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는 종, 일꾼이 되어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에 대한 복종과 순종이 회복의 계단

하나님은 사사시대와 엘리멜렉의 가문, 보아스와 이방여인 룻을 통해서 사사시대의 죄악을 끝내고 다윗왕을 마지막에 드러내심으로 장래의 소망을 말씀하셨듯이, 그 후손의 계보를 소개함으로서 인류를 구원하실 만왕의왕이신 예수를 예비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결론에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앞으로 나아온 이방여인 룻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쉽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대단한 사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이 일자체에 쓰임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공적인 권위까지 가진 사사들이 쓰임받지 못하고, 오히려 힘없고 병약해 보이는 비천한 존재로서 쓴 맛 나는 인생의 두 여인이 이 일에 쓰임을 받았는가 하는것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인생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출신과 배경이 부족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약함에도 말씀과 기도와 예배 가운데 하나님게 꼭 붙어서 하나님 편을 드는 교회를 맡기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미시적인 말씀과 순종의 삶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없었던 거시적인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미래의 영광을 취할 수가있는 것입니다. 인생처럼 살아보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내 발의 등불이 되시는 주의 말씀을따라 복종하고 순종하다 보면, 인생의 먼 길의 빛속에서 하나님의 거시적인 계획가운데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룻과 나오미 처럼 말씀에 한걸음 두걸음 다 알지 못해도 순종하며 걸어갈 때, 반드시 놀라운 기적같은 은혜를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

T. C. 함몬드의 조직신학에 보면,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를 어디에 두는가가, 그 사람의 정확한 영적인 위치를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되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자기가생각하기에 맞지 않는 것 같고 동의 하지를 못하면 옳은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속한 개혁주의적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최종적인 권위를 둡니다. 모든 신앙의 모든 문제의 최종결정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저자의 손을 빌렸지만, 그 저자가 성령께서, 죄성과 인간적인 한계를극복하고서 완전히 영감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잘못되면, 신앙자체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말씀에 겸손히 따르고, 배우는 신앙이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자기나름의 자가발전하는 신앙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제일 큰 손해를 보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 가장 치명적인 손해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설교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설교가 사람의 소리로 들리고, 내가 동의 못하는 부분 아멘이 되지를못합니다. 아멘이 안되고, 믿음이 가지를 못하니까 순종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단 열매의 맛과 순종의 열매인 여호와 이레의 맛을 보지 못하는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아도, 거기에 생명을걸만큼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탐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고 맛을 보고, 체험하는 기적같은 은혜의 보고이며 창고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창고문을 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면, 나의 생각과 다르고 이해의 범위에 들지 않아도 복종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복종과 순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복종은 자신의 뜻과 다르고, 의심이 가도 자기생각을 꺽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이란, 그렇게 복종해 보았더니 좋더라는 확신속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순종의 비결은 복종할 만 하니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복종하는 것이라는 자세를 가질때 순종의 자리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를 때, 룻은 말씀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축복의 길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해석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비록 말씀이 희미하게 보여도, 그것이 좋은 소식이 있는 좋은 길이라고 믿고서결단하며 나아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면, 좋은 것이면, 좋은 분들이 하는 일이면 열심히 끝까지 해야합니다. 거기에 참된 축복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교회가 결정하고 하는 일들은 좋은 일들입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경험하고 판단하고 분석해서 자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는 이유 가운데 분명한 것은, 자꾸만 작은 이성으로 점검하고 확인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내가 확인해서 파악되는 게 아니고, 나중에 은헤의 빛이 비춰짐으로 (illumination), 영안이 열려지고귀가 밝아짐으로 깨닫는 은혜가운데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쫓아가다보니까 저절로 알게 해 주심으로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동역자가 중요하고, 주변에 누가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룻처럼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약속의 말씀을 들었으며, 15장에서는 ‘네 자손을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게 하실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희미해 보이는 그 약속을 붙들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며 복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따르는 단순한 복종을 통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우상제작자의 아들의 위치에서 믿음의 조상의 자리에 들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를 끝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영원한 왕을 준비하시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은 사사가 아무곳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사의 권위도 없으며 천대받고 개취급 받는 이방여인이었지만, 어머니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철저하게 복종하고 순종했던 여인 룻을 통해서 하나님은 룻 자신과 룻과 관계된 그 가문과 인류모두를 살리는 축복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기에 크고 대단한 일에 쓰임받기를 좋아합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나의 행적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중요하게 여기시는 일에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붙잡고, 주의 말씀을 따라, 주의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하면서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 다시 오실 하나님을 예비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정말 중요한 일에 쓰임 받는 룻과 같은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다, 베레스, 오벳, 다윗 그리고 교회

룻기 마지막 부분 18절에서 22절까지에 나타난, 베레스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까지의 족보가 소개된 것은 무슨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왜 하필 베레스부터이며, 왜 다윗까지를 기록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유다의 지파에서 실로가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 실로가 오시기까지 유다 지파에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치리자가 끊이지 않을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유다가 영적인 장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과정에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수혼제도에 대한 율법의 요구에 호소하며 베레스를 낳게 됩니다. 베레스의 출생은 앞서 언급한 대로 축복된 모양과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의 의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베레스를 치리자의 계열이 되는 축복으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유다-하나님의 교회를 책임지는 영성과 결단

유다가문에 엄청난 영광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지가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조건과 형편을 뛰어넘어서도 축복할 자를 반드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유다의 가문과 후손들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오벳과 베레스에서 더 올라가서 유다가문에게 주어진 이 영원한 영광의 기원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도 룻에게 적용되었던 원리가 있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인격과 삶이 유다에게 올무가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축복하시는 야곱의 가정교회가 어려울 때 멀리 도망가지 않고서, 책임지는 영성을 가지고,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결단하고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 야곱의 가정교회 온 식구가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양식은 떨어졌는데 애굽의 총리는 베냐민을 데려오라 하고, 아버지 야곱은 내어 놓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유다가 전면에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베냐민을 보내주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해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이스라엘의 장자로 주목받게 되면서, 야곱은 죽기전에 유다를 축복하면서 그 집에서 ‘치리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유다지파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예언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으므로, 베레스와 오벳을 이어 다윗에게로,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 하나님의 가정 교회에 시련이 왔을 때, 아무도 책임지려 않을 때, 유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면에 나서서 이 어려운 문제앞에 뛰어든 것입니다. 유다의 집안을 살리려는 이 헌신이, 그의 집안에서 다윗왕가가 나오게 되는 축복을 거머쥐게 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안에는 유다가 이미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기계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결단하고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은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약속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지파에 왕의 축복이 온 것은, 바로 이렇게 야곱의 집이 전부 죽게 되었을 때, 목자와 같이, 생명을 걸고, 결단하고 각오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끝까지 가족들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서 유다에서 베레스, 보아스,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된 계보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고 축복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 자신을 포함해서 가문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족보책에 기록이 될 만큼 축복을 거머쥘 수가 있습니까? 룻과 같이 결심하고 결단하고 교회인 어머니를 쫓으며, 교회인 어머니를 섬기며, 끝까지 어머니인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유다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이방여인과 신앙적으로도 깊이 타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정 교회, 야곱의 집이 가장 어려웠을 때 모든 인격과 생명을 걸고, 그 어려움을 해결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과 가문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려울 때. 교회를 떠나지 말라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어려울 때.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자신의 모든 인격과 생명과 재산을 걸고 나서서 책임지는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자손과 가문이 복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명한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교회에 장로를 세우고 목회자를 세울 때, 이 점을 보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말을 신앙인처럼 하다가, 정작 어려운 일들앞에서 뒤로 빠져버리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조그만 어려움만 생기면, 쉽게 어머니같은 교회를 떠나는 사랍은 자격이 없습니다. 룻과 같이 유다와 같이 어머니인 교회를 위해 생명을 내어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학벌, 재산, 사회적인 신분만 보고, 장로를 세우고 직분을 맡기니까,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이, 위기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머니와 같은 교회를 지킬 사람인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꺼이 기쁨으로 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도망칠 사람인가를 간파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합당한 자가 세워질 때, 그 가문이 영원히 복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벳 - 사사시대를 종결짓는 서곡

이렇게 가문의 축복을 거머쥔 유다와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의 6대손이 보아스이며, 이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으며, 이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가 성군 다윗을 낳았던 것입니다. 족보의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이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치리자, 즉 왕이 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안식을 의미하는 성전을 짓겠다고 할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 주는 성군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의 손에 마음껏 쓰임 받았던 인물입니다. 마태복음의 구원의 서장을 열어주며, 영원한 왕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인물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기록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들을 알게 될 때, 오벳의 탄생의 의미는 너무나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오벳은 왕이 없어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시대를 종결짓는 서곡이 됨과 동시에, 이스라엘에 왕정시대를 가져오며, 그 왕정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군 다윗을 세우면서 종국적으로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사시대의 영적인 완악함은 오벳의 출생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벳은 왕이 없어 각각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캄캄한 사사시대에 한줄기 밝은 빛 되신 하나님을 드러내며, 미래를 열어가는 새로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 - 교회를 준비하는 영원한 회복

룻기의 결론의 마지막에 둥장하는 다윗은 궁전에 편안히 거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성전의 허술함을 안타까이 여기며,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은 만국에 평화를 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기에, 피를 많이 흘린 자신으로서는 지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이름과 영광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해서 그 아들 솔로몬 대에 하나님의 성전,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면서, 성전을 짓고 성전중심의 신앙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회복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다윗이 있으며, 다윗을 존재하도록 한 베레스의 족보가 의미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으로 시작해서 솔로몬에 이르러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스라엘은 참된 회복과 안식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게 됩니다. 교회 성전을 중심으로 삶의 회복과 안식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과 회복을 사모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윗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안식과 회복의 시대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도들이 누리지 못한 참된 안식을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축복받은 우리들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주위환경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교회에서 예배하고 찬송하며 참된 안식과 회복을 누리는 가운데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곳곳에 주님의 교회와 성전이 존재함으로, 주님의 교회에서 참된 만족과 안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회복된 사람들이 교회를 든든히 세움

룻기의 결론에 등장하는 다윗을 성전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왕정시대부터 이어지는 성전중심의 삶을 예표한다고 할 때, 4장 말미에 등장하는 본문 18절 다말의 아들 베레스로부터 이어지는 족보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만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기 원하는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삶의 절대적인 환경의 어려움들을 극복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앞에 나아오는 말씀과 순종의 삶을 통해 인생 역전 곧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장 말미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 왕조가 룻을 중심하여 형성된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첫 머리로 이어지면서, 만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족보는 전체 대수를 10으로 하고 있는 데, 그 중 “베레스”부터 “나손”까지 다섯 대는 애굽 생활 430년 동안 살았던 사람들이고, “살몬”에서부터 “다윗”까지의 다섯 대는 출애굽으로부터 다윗 사망에 이른 476년 사이에 산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명단은 제외되었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가 룻과 같은 절대적인 한계와 상처를 가지고서,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던 이방인, 출생과 신분이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 불경건한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러한 삶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서 순종을 드러내며 하나님안에서 회복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레스와 다말 그리고 라합과 보아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베레스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출생이 떳떳하지 못한 상처를 가진 사람입니다. 상상하기 힘든 할아버지 유다와 어머니 다말에게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그의 이름이 예수의 족보 첫머리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다말 같은 죄인도, 베레스와 같이 비천한 신분의 한계를 가진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는 구속의 족보 앞머리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 머물기만 하면, 인간족보와 한계가 어떠하든,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는 존귀하고 유력한 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출신도 실은 별반 대단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살몬이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의 남편으로 보아스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보아스의 육신의 어머니인 라합은 이방인이면서 기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에, 그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었고, 붉은 줄을 달아 내림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정탐꾼들을 숨겨줌으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멸망받아 마땅한 여리고성의 기생의 천한 신분이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결단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으로 회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점령 후에, 자신이 숨겨주었던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옴으로 관계의 회복 물질과 기업의 회복을 얻으며 생명의 회복을 경험하고 누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나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으시고 그의 이름을 높여주시고 기업을 허락하시며 영광스런 생명을 허락하시며 그 자손까지도 영화롭게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포함해서, 주님의 부르심앞에 순종하며 나아오고, 끝까지 말씀 붙들고 나아갔을 때 인생의 위대한 삶의 전환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룻의 굳게 결심함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듯이 이해의 통로를 통해서는 사실은 불가능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구태여 설명한다면 왠지 그 순간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고 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순간 있다는 것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의 간절함을 주시는 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겸손한 순종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향한 날마다의 돌아섬의 회복

룻과 나오미, 다말과 베레스, 라합과 보아스, 그리고 주님의 많은 신실한 신앙의 위인들의 삶에는, 스스로의 작은 이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으며,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향한 날마다의 돌아섬과 회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돌아섬의 회복의 결단을 통해서 엄청난 인생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향해 인생을 돌이킨 후에 손해본 것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판단유보를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만, 인생은 다 살아봐야 아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카운트하실분은 심판주 하나님 한분 뿐이시기에 판단한다는 것이 어리석을 수 있지만, 은혜가 넘칠 때 중간결산해 보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향해 나아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결단하고 헌신하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걸고서 반드시 축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을 찬찬히 돌아보면, 내가 부족하고 내가 덜 순종해서, 내 믿음이 견고하게 주님을 붙들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 쪽에서 원망받으실 일은 아무것도, 전혀 없더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베레스의 족보는 다윗의 출생을 알리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유다로부터 이어지는, 믿음의 결단을 가지고 상처를 회복한 다윗 왕가가 하나님나라의 역사에서 영광스러운 가문으로 인정받았음을 선포하는 선언의 시작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찬란하게 하나님 나라에 아름답게 별과 같이 빛나는 가문의 중심에 이방여인 룻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말, 베레스, 라합, 보아스, 룻, 나오미와 같은 그런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안에 끝까지 붙어 있는 사람,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이름을 이와 같이 별과 같인 빛나는 보배로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를 온전히 세워감으로, 다시 오실 주님과 영원한 안식을 예비

하나님께서는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건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 성전을 준비하는 다윗을 말씀하십니다. 이 다윗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세울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성전을 통해 교회의 몸이신 메시야를 대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앞에 신실한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그 교회를 이 땅에 주의 영이신 성령공동체로 세워가는 하나님의 작정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 앞에 회복된 자들을 통해서 성령공동체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심이 룻기를 통해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날의 시대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 시대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에 붙들린바 되어, 말씀과 성령으로 주님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회복(화목)되어 주님의 교회로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영광중 맞이하며, 주님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룻기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예표되었듯이, 말씀과 성령안에서 회복된 모든 교회는 신부로서 아름답게 단장하여 다시 오실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복되게 드러낼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