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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시편 122편 6절 )

글쓴이 : 홈피관리자 날짜 : 2015-02-12 (목) 17:21 조회 : 2047
설교자 : 담임목사
본문말씀 : 시122:6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시편 122편 6절 )
 
예배가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심각한 영적공황의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예전처럼 교회를 핍박하는 부당한 공권력으로 인한 예배의 폐지는 아니지만 교회들 스스로가 전통적인 예배의 시간들을 점차 없애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지으시되 예배를 통해 최고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신데, 인간 스스로 예배를 폐함으로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고자 하는 온전한 축복들을 쉽게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가 최고의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축복의 통로를 스스로 폐쇄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 값싼 신앙

 신앙생활은 예배생활과 교회생활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교회에 갈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에는 몇 분의 선호하는 스타 목사님들이 앱으로 연결되어있고, 특별히 좋아하는 목사님, 친정 목사님, 친구 목사님, 상담 목사님 등등. 말씀의 홍수 속에서 그저 원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의 감정적인 동의만 있으면 큰 은혜 받았다고 쉽게 말합니다.

  문명의 도움으로 인해 그런 은혜를 받을 수만 있으면 장소는 상관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불속에서 속옷차림으로 발가락으로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하기만 해도 쏟아지는 말씀 속에 스스로 참된 예배자로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혼을 좀먹는 대단한 착각입니다.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점점 더 강도가 세어지지 않으면 감동이란 것은 나중에 맹물 숭늉 맛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듣기는 많이 듣고 아는 것도 많은데 삶의 온전한 헌신과 변화가 없게 됩니다.

    신앙은 변화이며 변화의 결론은 헌신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씨앗이 흙에 떨어져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가는 과정의 변화를 통해서 열매라는 결론을 맺어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열매를 볼 수 없는 값싼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해야 합니다

    예전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새벽과 주일날 들려지는 그 말씀 한절 한절을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고 교회 가는 일에 늦어지면 장로님이라 해도 그 벌을 면할 수 없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말씀의 홍수임에도 열매를 보기 힘들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뚜렷한 현상이 교회중심적인 삶의 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꼭 교회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집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귀신이 아닌 이상, 영으로만 어찌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영혼의 그릇인 몸이 눈에 보이는 예배당으로 나아올 때, 온전한 영적인 예배가 몸의 순종을 통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시대성이 진리의 다양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내가 섬기는 바로 그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헌신해야 될 한 교회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출발점-교회

 예전에 한국에서는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보고는 ‘교회와 결혼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엄청난 축복의 말이었고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반드시 그 자신과 가문이 귀한 복을 받았음을 봅니다. 지독하게 예수 잘 믿는 집안, 결코 망한 예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려울수록 더 새벽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힘들수록 더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삶이 힘들어서 신앙생활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원래 신앙이란 것은 ‘어려울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인데, 외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핑계가 삶의 어려움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삶은 삶대로 어려워지고, 삶의 어려움을 뒤엎어놓을 능력의 신앙심도 없다보니 결국은 영육 간에 실패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할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교회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교회에 엎드려 부복하여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의 삶’을 살라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많은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자신이 산제물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가 아닌 예배를 주관하고 인도하는 소수의 설교자와 찬양대 등 앞선 이들을 바라보는 보는 예배가 되어질 때, 결국은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 예배는 설교자와 소수의 인도자를 보면서 평가하고, 설교를 중심한 예배를 잘하고 못함의 평가를 가져오는 엉터리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마치 구약의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신을 섬기듯이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호불호를 따라서 자기 기준에 합당한 설교목사를 발달문명의 기계 속에 세워두고 생명 같은 예배를 스스로 망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영혼이 제일 큰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곳
 
    교회를 온전한 믿음으로 섬겼던 분들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당신들과 함께 하심을 믿었지만 동일하게 저들이 구체적으로 확신한 것은 자신들이 섬기는 예배당 교회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과 그곳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의 작은 물품하나 마저도 하나님의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생각하였으며, 눈에 보이는 주님의 교회를 위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피같은 물질도 아낌없이 그리고 마침내 삶 전부를 다 드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헌신의 섬김을 받으시고 한량없는 은혜로 넉넉히 되갚아주시는 아름다운 은혜의 전성시대-믿음의 명문가문들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고 그 하나님은 내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교회중심으로 삶의 일들을 재편하십시오. 교회를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십시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라는 것이 율법적이요 교회주의자 같은 얘기라고 비판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율법주의자가 될 마음도 있습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그저 찾아가서 안기기만 하면 어머니품안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자람과 성숙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늘문이 항상 열려있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함으로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지고 좋은 것을 넘치게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다윗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노래의 핵심인 본문은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위하며 기도하는 자에게 형통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궁중에는 형통이 있다 하였습니다. 평강과 기쁨을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은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오늘날 교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시편121편의 눈을 들어 산을 보라합니다.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주님의 성전이 있는 곳, 오늘날의 교회를 사랑하며 살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영육간의 형통함과 평안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중심한 삶은 예배의 삶을 말합니다.

    주님의 피흘려 값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합시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몸을 드려 예배합시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한 삶을 살아갑시다. 내가 섬기는 목사님이 분명한 신앙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때에,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온전히 붙들 때, 영육 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형통이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