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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의 축복 은혜의 영광

글쓴이 : 홈피관리자 날짜 : 2022-10-14 (금) 08:05 조회 : 60

부족함의 축복 은혜의 영광 - 한계, 무능, 믿음 -

 

모든 사람들은 세상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추구하고 또한 축적하기를 원한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라는 말은 바로 그 힘의 중요성을 잘 표현하는 말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힘이든지 소유하기를 원한다. 어떤 종류의 힘을 원할까? 무엇보다 생존과 직결되는 건강한 육체의 힘을 원할 것이다. 또한 이민자들의 꿈의 소원이라고 하는 주님 돈 세다 잠들게 하소서의 성취를 기대하는 재물의 힘을 원한다. 그리고 지식의 힘도 필요해서 자식공부 만큼은 목숨 걸고 달려드는 것을 본다.

 

이러한 힘들, 체력, 재력, 금력 등을 생각해보면 꼭 필요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딱 한가지, 그 힘을 빼고 나면 나머지는 바람에 나는 겨에 불과해지는 힘이 있다. 오히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찾고 구했던 그 힘들이 외려 자신에게 해로움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그 한가지 힘이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구원의 은혜에 온전히 빚어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힘, 영적인 힘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함께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 하나가 없으면, 인생이 가지고, 누리고, 자랑하는 그 모든 것들은 그저 헛된 것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체력, 물질, 지식의 힘

예전에 자신의 건강한 체력을 자랑하던 한국의 대표적인 남자 배우가 있었다. 여든의 나이에도, 웃통을 벗어재낀 채 근육통을 자랑하던 것을 기억한다. 흰 백발을 휘날리며 그 잘 생긴 얼굴을 드러낼 때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 건강한 몸에 하나님이 없으니,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내용물들은 듣고 보기에 안타까움을 주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좋은 몸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젊은 날 부인 몰래 바람피운 이야기를 자랑거리 무용담처럼 부끄럼없이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니, 쓰레기를 보고도 쓰레기로 판단하지 못하는 아쉬운 인생의 아둔함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는 일이다.

 

재력을 자랑하는 분들도 있다. 돈 자랑이다. 들어보면 엄청나다. 보통 사람은 꿈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많은 재력들도, 한분 하나님이 주인됨을 의식하지 못하면, 결국 더욱 고급스런 죄를 저지르며 자신을 망치는 오물과 같이 되는 것을 본다. 차라리 가난하여서 주님을 만났더라면, 영원한 복을 경험했을 터인데, 유한한 이 땅의 복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쳐버리는 바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이를 증명하지 않은가? 땅의 유한한 것에 만족하며, 영원한 가치의 복을 놓치는 인생을 바보, 어리석은 인생으로 지적하는 내용이다. 그의 금력이 하나님을 이 땅에서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전하는 말씀의 메시지앞에서도 꿈적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단을 웃음짓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돈처럼 손에 확실히 쥐어보고야 깨달은 그의 구원은 언제일까? 지옥에 가서야, 천국의 실재를 믿는 바보의 믿음, 늦어버린 믿음, 소용없는 믿음의 구원밖에는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


지식을 자랑하는 분들을 본다. 은근슬쩍 자신이 어느 학교를 나온 수재인가를 자랑한다. 그러나 한가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지 못하는 인생의 지식들, 그 자랑들이 차곡 차곡 쌓여질 때, 정말 인생이 자랑해야 마땅할 예수님은 그저 뒷방 어르신 자리에 머물고 만다. 그 예수님은 자신의 지식으로 담을 쌓아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행색을 더한 저들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으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과 같이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자리에 이르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때, 저들 인생에 허락된 그 고귀한 지식은 오히려 배설물보다 못한 것이 될 따름이다.

 

좋은 힘, 영적인 능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여러 힘이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힘, 영적인 힘, 성력의 능력이 필요하다. 영력을 지닌 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가장 존귀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력과 성령의 능력은 누가 주시는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한 온갖 좋은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 모든 힘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죄인의 연약함에서 출발한 자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건강, 가정, 자녀, 인간관계 등의 문제들 앞에서 한없이 약해보인다 할지라도 놀랄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시험에 실패했을 때, 자신의 무능을 확인하고 어깨가 쳐진다.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질병을 만나 고통스러울 때는, 한없이 작아지고 의기소침해진다. 가정생활에서 위기를 만나고,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는 엄습해오는 무력감에 몸둘 바를 모르게 된다. 이런 때에, 자신의 무능을 아무리 부정해보고 몸부림쳐 보아도 당장 변화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힘있는 사람을 찾아서, 처세를 해보려 해도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그러할 때, 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늘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향한 믿음이 새로워지고, 빈 가슴위에 채워지는 그 믿음만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역전인생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저들 간증의 출발점에 지극한 고난과 연약함, 무능함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한마디로 대책 없는 삶의 일들이 대부분이다. 최근에 만난 한국의 어느 목사님은 세 살 때 의사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간호사인 어머니는 병이 들어 병을 고치기 위해 집을 떠나셨다. 혈혈단신 조부모님의 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와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두 마디의 말로 표현하셨다. “머리 숙이며 다니는 아이, 아무런 웃일 일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가장 뜨겁게 하나님앞에 쓰임받는 목사님이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조부모님 조차 예수를 안 믿는 그런 형편임에도,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세상의 결핍들앞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충만함을 경험한 결과라는 간증이다. 비워진 만큼 넉넉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증뿐인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다.

 

어떤 목사님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집이 초가지붕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집 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며 너무 좋아했는데, 그러고 며칠 지나다보니 마을의 다른 집들은 기와지붕을 얹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면, 소 먹이러 나갔다가, 소를 잃어버리고 해가 어둑해서 집으로 돌아와보니 소가 먼저 집을 찾아와 있더라는 이야기도 웃으며 한다. 은혜가 임하니,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 어찌 보면 부모 원망하고 삶을 비관했을 이야기들도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같은 간증 스토리가 되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분은 아버지가 술과 도박에 빠져서, 한칸 방에 손님들을 불러 놓고 담배연기 자욱하게 내려앉는 그 때에 앉은뱅이 책상 밑에 얼굴만 집어 넣고 신선한(?)공기를 호흡하며 잠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자란 후에 신학교를 갔는데, 이제는 반지하에서 생활하면서 화장실 가기가 불편해서 요강을 두었는데, 그 요강을 들고 계단을 올라 바깥 세상을 향해 갈 때마다, 출렁이는 물결(?)에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말씀하시면, 슬픈 이야기가 슬프지 않게 들린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 때문이다.

 

예외없는 한계와 무능

가을이 되면 더욱 마음이 예민해지는 분들을 본다.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한가?’ 한마디로, 너무 매일 필요가 없는 생각들이다. 신앙의 거인들조차 이런 낙심에 빠지는 경우들이 많았다. 열왕기상에 보면 구약의 영웅이었던 엘리야도 이런 낙심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 죽을 수는 없으니,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 한마디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독백하는 것이다. 시편기자도 한때 이런 낙심에 빠져 있었다. 42:11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는 고백을 읽게 된다. 더 나아가 사도바울조차도, 고후 1:8-9절에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자기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한마디로 사람의 한계와 무능이라는 것은 예외가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낙심에 빠질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괜찮다고 먼저 인정하며 자신을 다독거려야 한다. 이렇게 원망스럽고,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날 때가 있어도, 그런 때에 더욱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도록 방향을 정해야 한다. 아무런 힘도 없고, 조건과 환경이 부족하여도 주님의 은혜의 빛이 비춰지고 영적인 힘을 얻고 누리게 될 때, 모든 것을 합력해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몇 갑절로 경험할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실제, 인생의 무능함 속에 좌절을 경험했던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인생의 어려움들을 더욱 귀한 양념처럼 사용해서, 걸작품인생을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청소년 사역자들가운데, 청소년 시절에 어려운 환경속에 방황해보신 분들이 더 귀하게 쓰임받는 것을 본다. 이유는 훨씬 더 저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런 어려움속에서도 자신을 만나주시고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앞에 거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빌리 그래함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도 40세까지 마약에 빠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동성애 반대부터 어떻게 저렇게 담대하게 아버지의 사역들을 계승할 수 있었을까? 그런 지독한 좌절을 경험한 후에 채워진 하나님의 은혜가 그만큼 더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손현보 목사님이라는 분도 마찬가지다. 그의 사역목표는 아주 분명하다. “죽기밖에 더하겠나, 어차피 죽을 건데.” 이런 신념으로 목숨걸고 교회와 예배를 위해 싸우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왜 인간이 문을 닫아라, 말라 할 수가 있느냐?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생명다해 일하신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어린 시절 삶의 좌절을 맛보고, 이에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동시에 맛보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의 삶은,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은 삶이었기에, 목숨걸고 신앙생활하고, 목숨걸고 목회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엄청난 환경 조건의 무능함과 좌절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쓰시는 대목이 된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나름대로 힘을 축적해서 꽤 강해 보이는 것 같아도, 한순간에 지치고 피곤하며 맥이 탁 풀리는 것이 인생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자. 이 가을 주신 이유는, 단순히 단풍잎의 화려함과 세월의 속절없음 앞에서 허무와 공허를 노래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더욱 주님을 바라보며, 주의 은혜에 붙들려 열매 있는 인생, 주께 바쳐드릴 열매가 풍성한 가을을 노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