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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생명같은 믿음

글쓴이 : 홈피관리자 날짜 : 2020-11-13 (금) 04:29 조회 : 128


 

믿음과 행위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와 같다. 본질이 현상을 드러내듯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야 하며, 참된 신앙의 본질이다. 그렇지 못한 것을 거짓되다고 말한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에 무언가 다른 어떤 추가될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된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이다. 사과열매를 맺는 나무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 그 나무는 사과열매를 맺을 것이다. 붉은 장미 잎을 말려 따뜻한 물에 넣으면 붉은 물감이 번져 나온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이 부족해서 행위를 덧칠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가 가진 믿음이 정확하다면 그의 말과 행위와 삶의 양식에는 당연한 믿음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쉽지 않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다고 하지만, 세상과 사람을 보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는가? 특별히 믿음이 충분히 있으리라고 여겨졌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 혹은 목회자까지 과연 그 믿음을 행위로서 얼마나 증명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스라한 느낌이 찾아온다. 그저 매일 매일 오직 주의 은혜만을 구하면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듣지 말고, 성령께서 친히 모든 것을 가리워 주셔서, 오직 은혜와 감사, 오직 기쁨의 길로만 행하기를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다.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다. 특별히 목회 가운데, 믿음이 당연직으로 요청되는 중직자의 신분과 그 신분의 함량에 이르지 못하는 일들로 인한 상처를 감내할 수 있는 지혜를 더욱 구하게 될 따름이다.

 

신앙의 주장과 믿음의 행동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앙은 무엇인가? 주장하는 데서 끝나면 안되고,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야함을 의미하고 있다. 소박한 예를 들어보자. 형제를 보며 불쌍한 마음이 들었고 그를 돕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결국 돕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괴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변명한다. ‘그 사람 참 안 됐다. 정말 도와주고 싶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신앙의 주장일 따름이다. 결국은 돕지 않았고, 형제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겨 주라는 성령의 감동과 음성을 거스르고 불순종했음을 고백한 것이다.

 

성도들을 만나 평안히 가라는 의미의 샬롬을 말하지만, 아주 예의바른 인사로, 자신은 그 형제가 당한 상황에서 멀어지는 것은 결국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명이 있음을 확인할 때, 코에 손을 대고 숨쉬는 여부를 확인한다. 그것 외에 더 추가할 것이 있는가? 없다. 그것으로 충분히 그의 생명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에게 신자로서의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 콩 한조각이라도,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의 참 성도의 본질이 드러나는 빛깔이 아니겠는가?

 

신앙고백, 감정과 의지

참 신앙의 고백은 지적수용뿐 아니라, 두려운 감정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는 것도 무슨 소용이 있나? 오늘날 이 시대에 적용해보면 대부분이 지적수용에 그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가정이나 교회나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안타까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앞에 두려운 감정도 가지지 않는 것을 본다. 예수님의 등장에 무슨 상관이 있길래 자신들을 멸하러 왔느냐며 떨고 있던 귀신만도 못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주의 종이라고 하면, 그저 주의 일꾼이요 노예와 같은 존재임에도, 오늘날은 노사관계처럼 하나님과 맞짱을 뜨려는 듯 두렴없이 말하고 행하는 것을 본다. 퇴락한 신앙의 소견이다.

 

최근에, 하나님께서 코로나라는 대포를 교회에 쏘아서, 교회를 헤쳐 영상예배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 엉터리같은 일들이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가 한국교회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친 존재라고 할 때, 정말 생각을 혼돈케 한다. 종말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주님께서, 과연 주의 성전을 대포를 쏘아서 해체를 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세에 모이기를 힘쓰라하신 그 모임은 그저 단순히 모여지는 것(just gathering)’, 온라인에서도 모이지 않나? 라고 말하는 그런 모이는 현상을 말함이 아니라, ‘모임(meeting)’이라는 공동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딤전3:15을 보라.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곳은 성전이다. 그곳에 어떻게 대포를 쏠 수가 있을까? 인문학과 성경적인 추리를 덧붙여서 유려한 영상의 분위기를 가지고 설득하려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믿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앞에 나아오고 은혜로운 말씀을 읽고 듣고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은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자신에 관한 지식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나를 안다. 하나님을 알수록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자신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알기전에 모두 잘난 사람들이었다. 빛이 비추기전에는 어둠속에 있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빛이 비추이자, 내가 있던 곳이 어둠이었으며 거친 먼지가 많았음을 보게 알게 된다.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결국 자신의 추한 모습이 역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에서 믿음의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변화의 태도와 자세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변화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을 티끌같은 존재로 표현한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고 두려움을 말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중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뵈었다고 말한다. 신약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후에 자신이 죄인임을 겸손히 고백한다. 공통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난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신의 죄된 모습에 절망하고 겸비해진다. 두려우신 하나님앞에 경외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만난 사람이다.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변화를 가져온다.

 

태도의 변화가 참 신앙의 증거이며 현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주일이 소중한 날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두렵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소중히 여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을 존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존중하며, 겸손함으로 결코 하나님의 교회에서 목소리 높일 일을 만들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태도의 변화 뿐 아니라 성도들에 대한 행동, 세상에 대한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관계에서의 변화된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앞에서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의 지식과 감정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에 유익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리의 행위는 결코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 신앙의 고백, 생명.

예전에 오리건주 포틀랜드 인근 대학에서 10명이 숨진 총격 사건이 최근에 다시 방송을 타면서 기억을 소환했다. 내용은 잘 알고 있듯이, 포틀랜드로부터 남쪽으로 약 300떨어진 로즈버그의 움프콰 커뮤니티 칼리지(UCC)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이다. 용의자를 포함해 10명이 죽고 7명이 다쳤다. 총기 난사를 벌인 이는 그곳 주민 크리스 하퍼 머서로 밝혀졌다. 머서는 사건 현장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사망했다. 그는 총격 당시 권총 3자루와 장총 1자루 등 모두 4개의 무기를 소지하고 학교로 들어갔다. 글쓰기 수업을 받던 교실로 들어간 용의자는 다른 사람들을 엎드리게 한 후 차례로 일으켜 세워 무슨 종교를 믿느냐고 물은 뒤, 총격을 가했다. 현장에서 광경을 목도한 이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총을 든 남성이 교실에 들어와 그리스도인만 일어나라고 한 뒤,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은 뒤에, 그렇다면 1초후에 너의 신과 만나게 될 것(because you are Christian, you are going to see God in just about one second)이라며 머리에 총을 쏘았다는 것이다. 더불어 크리스챤이 아닌 학생들에 대해서는 다리나 다른 곳에 총을 쏘았는데, 그런 죽음의 공포가운데서도 모두가 자신의 신앙을, 생명과 바꾸는 믿음으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예인가? 마치 중고등학교 수련회에서, 6.25 전쟁 당시 공산당이 예수님의 사진을 밟으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는 말에, 그림은 우리의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으로 은혜스러운 수련회를 진행하려던 선배를 무색하게 만든 기억이 떠올랐다. 실은 사진이나 그림으로라도 예수님의 얼굴, 진본여부를 확인할 길 없지만, 그렇다고 그 얼굴 사진을 밟을 용기도 예나 지금이나 부재하다. 그러나 분명, 이런 극단적이라고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이 엄숙해지면서 조금씩 자신과 주변의 모습들을 생각하게 된다. 과연 예수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진짜 자신의 생명과 바꿀만한 믿음을 고백하고 순종할 수 있는가? 더불어, 그런 예수를 고백하도록 성도들을 목양하고 있는가? 너무 기호에 맞는 악세사리를 선택하듯 성도들의 선택에 공감협력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진지한 반성을 하게된다. 과연 입술로 말하고 고백함으로 구원받는 그 신앙이, 모든 논거를 떠나 직접적으로 우리의 삶에 생명만큼 소중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코로나 시국을 지나면서, 마치 불을 통과한 믿음처럼 너무 일찍 자신이 가진 신앙의 내용물을 토해 내는 것을 본다. 목사로서 괴로운 일이다. 세상을 담대히 이길만한 좋은 것을 먹이지 못함이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럽고, 아쉽고, 괴로운 마음이다. 오죽하면, ‘나는 사람이 변한다는 것도 믿지만, 변하지 않는 다는 것도 믿습니다.’는 말을 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