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f70c8bc4a77a41c68644d025012f1f_t4Dsv5fNHx1THGTaKo11PbM6.gif

총 게시물 55건, 최근 0 건

익숙함과 편안함의 미혹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20-08-21 (금) 12:09 조회 : 69

익숙함과 편안함의 미혹

 

종말시대에는 미혹케하는 영이 많이 설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글에서 미혹케 하는 자를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다른 교훈,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칭합니다. 그런데 종말의 때에 적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실체적인 대상으로도 등장하겠지만, 그 연원을 따라가 보면 그것은 악한 영적 세력의 근원에서 시작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단마귀의 궤계를 통해 주의 법을 대적하고 주의 자녀들을 허무한데 굴복하게 만드는 모든 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 가운데서, 크고 작은 외부의 시련으로 공격받는 일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내부의 정욕의 욕심으로 악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66권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하게 고백하면서도, 그 진리의 말씀의 반향은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진영논리가 적용되는 것을 보면 사단이 사용하는 교묘하고 악한 지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앞에서도 각기 다른 이해와 해석을 주장하며, 성도들의 영혼을 혼탁하게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공동의 장소에서 검증된 설교자로부터, 그 시간, 그 장소, 그들에게 허락하신 준비된 말씀이 아니라, 유모의 젓동냥 모양으로 스스로 찾아 듣는 말씀들을 준거없이 취식함으로, 양들의 입에서 나오는 열매들이 극히 순전치 못함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로 인한 영상예배의 시대가 등장함으로, 인터넷 매체를 통해 마치 마켓에 장을 보러 가듯 자신들이 원하는 예배, 자신의 감정에 맞는 설교, 현재의 편안함을 타인으로 하여금 방해(?)받고 싶지 않은 홀로 예배드림 등의 시류가 넓게 퍼져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는 동안,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미혹케할 수 있는 영향력을 구별없이 취하게 되는 것을 저들의 말을 통해 듣고 봅니다. 말은 그의 속사람을 대변하고, 그 말이 그 삶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분별없이 영상의 화려함과 명성에 흡착해서 오랜 시간 예배드린다고 인터넷에 붙들려 살아온 결과, 저들 영혼에 믿음의 틈새가 벌어진 것을 봅니다.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새벽마다 울며 불며 교회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과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라는 용어를 무당의 굿당이나 불교의 사찰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그렇게 설교하는 유명한 목사님의 견해를 자기 것인양 들고 찾아 옵니다. 오랫동안의 격리된 인터넷 예배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오염이 되었던 것입니다. 틈을 타고 미혹케하는 영들이 찾아오기까지, 말씀과 성령의 조명하심이 비추어지지 못함으로 틈새를 발견할 기회까지도 쉽지 않습니다. 새벽제단이 어떻게 무당의 굿판에 비유될 수 있습니까?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이 어찌 샤머니즘사상과 동일시 될 수 있습니까? 자신이 선택한 설교자, 자신이 설교자를 지명(?)하여 부를 수 있는, 그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가 이런 악한 열매를 맺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귓가에 들려진 설교는, 그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런 상식적인 신념을 강화하는 지절거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결코 영혼과 삶을 변화시켜낼 수 없습니다.

 

교회와 예배에 대한 기본기를 회복해야 합니다. 기본적인 영적 축성이 적의 공격앞에 틈을 내어주지 않는 복된 길이 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을 보면, 매일 똑같은 것을 연습합니다. 그 연습곡이 잘되어서 기본이 된 사람은 곡을 연주하는 것이 쉽습니다. 이처럼 기본기, 본질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의 기본기,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예배가 없이 교회에 모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된 후에야 다른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되면 교회는 타락합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를 보면 결국 예배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 핑계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로 모일 수 없어도,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엄청난 위험이 따름에도 이민자들은 살기위해 가게 문을 열고 운영합니다. 목숨걸고 장사한다고 말합니다. 이해가 되면서도, 동시에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교회는 목숨 걸듯이, 오히려 그럴 일도 없이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모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웃을 위한 배려라고 합니다. 혹여 교회에 모였다가 전염의 진원지가 될까 싶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 영혼에 틈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편한 것을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편한 것이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에 틈을 내고, 미혹의 영들이 꽈리를 틀고 자리잡을 수 있는다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이 환란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리운 교회로 더욱 힘써 모여야 함에도, 익숙해진 홀로 예배, 홀로 신앙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로 오는 것,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헌신하고 봉사하는 교회는 가급적 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말씀의 책망도 받지 않고, 들키지도 않는 곳에서 적당히 앉아있다 가면서, 자기는 예배드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교회를 찾아오면 변화의 기회를 주실 것이지만, 이것마저 번폐스러운 일로 여기게 될는지 염려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몸이 편해지고 생각이 편해질수록, 하나님과 반대되는 나쁜 쪽으로 흘러가는 일들을 상식처럼 행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마음이 더 강퍅해집니다. 이상합니다. 그렇게 어려우면 기도하고 매달려야하는데, “목사님, 마음이 편해야 예배도 드리지요?” 라고 하면서 오히려 더 짜증스러워 합니다. 틈 사이로 미혹의 영이 젖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렵거나 편하거나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께로 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내가 배제하면, 내가 살 것 같지만, 아무리 살맛나는 인생을 살 것 같아도 죽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타협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임재와 성령의 교통하심을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홀로족() 예배에 심취합니다. 교회들의 영적지도자 역할을 하셔야 마땅한 믿음의 스승되신 분들도 타락해 갑니다. 미혹의 역사가, 큰 댐의 작은 틈새처럼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우리 영혼의 댐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힘쓰고 애쓰는 모습속에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만을 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