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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에 용서가 필요합니다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9-07-25 (목) 05:46 조회 : 84


가까운 분들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왜 사는가? 어찌 살런가? 그런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또한 매년 반복하며 돌아오는 고난주간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참 좋습니다. 모든 복잡한 생각과 일들을 잠시 내려놓고 본질을 질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에 다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는 왜 목회를 하는가? 목사인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늘 비슷한 질문에 같은 답이 나오지만, 목회사역에 대한 복잡한 일들을 가지치기하기에 너무나 좋습니다.

 

 

금년은 특별히 십자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고 선명해짐을 느낍니다. 오늘날은 아무나 십자가를 걸고 붙이고, 몸에 그리고 다니지만 당시의 십자가는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를 금할 정도로 지독하고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해, 그저 값없이 공짜선물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주님은 그 값없는 구원을 위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의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짧고 유한한 인생의 허무함에 몸부림치는 연약한 인생들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까지 고통하셨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 큰 사랑 앞에서, 조그만 상처에도 엄청나게 아픈 가시처럼 반응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시간들입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첫마디가 용서였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들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는 누가하는가? 혹자는 오래된 성도, 중직자, 목회자는 당연히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에게 질문합니다.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성질 급한 베드로는 답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일곱 번 정도하면 인간의 규범과 도리 정도는 하는 것 아니겠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일흔번에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불가항력적인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말씀합니다.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의 거의 20년 품삯을 모은 것이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갚을 수 없는 양입니다.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리고 그 갚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한 사람은, 내게 있는 일백 데나리온 같이 비교불가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능히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서가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이즈를 모르거나, 눈앞의 유익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는 직분에 따라가는 것도, 신앙의 연륜에 절로 녹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복잡한 세상의 일들과, 행정적 목회의 일들을 내려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면하고 사는 사람들만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평생 죽어서도 얼굴보아야 할 믿음의 동지들 가운데서도, 목회자와 성도간에도 용서치 못한 크고 작은 상처와 말들이 존재함을 봅니다. 묵은 체증의 찌끼같이 자기 영혼을 할퀴고 상처내는 일들 속에서 고통하는 것을 봅니다.

 

 

목회에 용서가 먼저 필요합니다. 상처나고 아픈 자신의 영혼을 움켜쥐고 자신조차 세울 수 없는 상황가운데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민교회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내 갈등과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품고 살아갑니다. 상처마저도 결국에는 귀한 간증거리로 변화시켜 주시겠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지나갑니다. 너무 아픈 나머지 육신의 병을 얻고 쓰러지기도 하며, 저주와 정죄의 날선 칼을 품기도 하고, 오랜 세월을 소명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고통의 원인을 어느 특정인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컴퓨터의 쓰레기통 기능처럼, 깨끗이 지우고 새로 포맷을 하면 될 법도 한데 사연을 들어보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고, 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주님이 영광거두시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십자가 사랑안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깨끗하게 지워버리며 용서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는 애초에 용서할 자격조차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자리에서 시작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처럼, ‘아버지하고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타인의 무지와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그 기도와 용서의 선포가, 주님을 못박던 저들의 완악한 마음을 변화시켜 훗날 성령안에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세워가는 무리들이 된 것처럼, 우리 모든 삶에 유익함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한번 두 번 지워도 잘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질긴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시고 반드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으로 풍성한 목회와 삶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며, 용서하지 못할 일과 사람에 대해 용서하고 기억속에서 완전히 지워내시기 바랍니다. 용서하면 살아납니다. 용서하면 회복됩니다. 용서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