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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의 꿈은

글쓴이 : 담임목사 날짜 : 2018-03-31 (토) 14:18 조회 : 211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9) 한경직(1902~2000)

"공산당에 시달리다 월남… 서울 저동에 영락교회 세워
美 유학시절 폐결핵 앓고 타임지·내셔널지오그래픽 정기 구독하기도
평화통일 소망하며 모든 교회 하나되기를 주장"

한경직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한국에 개신교가 전파된 것은 미국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젊은 전도자가 1885년 부활절 아침에 배를 타고 인천에 와 복음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아펜젤러는 미국 감리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였다. 두 선교사는 서울에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만들었다. 언더우드는 경신학교와 연희전문 그리고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아펜젤러는 배재와 이화, 정동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파는 뜻밖에도 서북 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새뮤얼 모펫(마포삼열) 같은 거물 선교사가 등장해 평양에 숭실학교와 장대현교회 등을 설립했고 3·1 독립운동에 가담한 길선주, 이승훈, 조만식 같은 교계의 거인들을 배출했다. 서울에는 감리교신학교가 설립됐고 평양에는 평양신학교가 설립됐으니 양반이 많이 살던 서울보다는 상민이 많이 살던 평양과 신의주 등지에서 개신교, 특히 장로교가 판을 치게 된 것이다.

한경직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장로교에 입교해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해 9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와 설교를 하는 단순한 생활을 되풀이했다. 그가 관련한 사회사업 단체나 교육기관은 수십 군데였지만 어느 하나도 한경직의 기도하는 삶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오산학교에 입학해 남강 이승훈의 훈육을 받았고 숭실전문에 진학해 학업을 마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 캔자스 소재 엠포리아 대학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후 신의주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시무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1933년 일이었다.

젊은 교역자 한경직이 심혈을 기울인 그 교회는 날로 성장해 서북에서 유명한 교회 중 하나가 됐다. 거기서 그는 해방을 맞았고 공산당에 시달리며 교회를 지키려 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1945년에 월남했다. 오늘의 영락교회가 자리 잡은 중구 저동 땅을 사들여 그 땅에 세운 영락교회는 몇 년 사이에 교세가 일취월장해 정동감리교회와 견줄만한 장로교회가 됐다. 먼저 설립한 새문안교회를 따돌린 셈이다.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부터 고아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서울에 와 영락보린원을 만들었다. 국군의 힘이 막강해지자 그는 군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고 대광고등학교를 신설해 오랜 전통을 지닌 배재 못지않은 기독교 사학으로 키워냈다. 그는 기독교 교육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기회만 있으면 학교를 세워 집안 형편 때문에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기독교적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한경직에 관한 짧은 글을 한 편 쓰면서 그가 1902년에 태어나 2000년까지 장장 99년의 긴 생애를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감동했다. 미국 유학 시절 영양실조로 폐결핵을 앓게 돼 한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장수가 기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가 젊어서 과학을 전공하려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려합섬 회장이던 장치혁은 한경직의 관심이 영락교회나 그가 관련된 교육기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4차원 세계를 꿈꾸는 데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경직의 꿈은 영락교회 하나를 큰 교회가 되도록 키우는 일이 아니고 전국 교회, 더 나아가 전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하나 되기를 바라는 큰 마음이었다. 그는 신앙 생활이 감성에만 치우치면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며 신앙이 이성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교인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성경에만 몰두하지 않고 미국의 타임지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정기 구독하면서 시국의 변화나 자연과 과학의 세계에 대해 마지막까지 큰 관심을 가졌다.

한경직은 말년에 한 측근에게 정의와 자유에 입각한 평화적 남북통일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한국의 모든 교회가 하나 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받은 템플턴상을 한국의 한경직도 받았다. 빌리 그레이엄과 견줄만한 한국의 교역자가 한경직이다. 그는 남한산성 안 조그만 방에서 조그만 침대에 누워 노년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몇 년 더 살 수 있었다고 믿었건만 그는 자다가 그 좁은 침대에서 방바닥에 떨어져 입은 상처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주변 사람들은 애석해한다.

영락교회는 이 나라 대형 교회의 효시였다. 그러나 그 뒤에 생긴 대형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가 그 교회를 시무하는 동안은 교회에 분쟁이 없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를 가진 적이 없고 땅 한 평을 가진 적이 없고 은행 통장도 가진 적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는 추문에 휘말릴 필요가 없는 깨끗한 성직자였다. 아프리카를 탐험한 선교사 데이 비드 리빙스턴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자, 리빙스턴이 답하기를 "나는 오늘 아침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고 한마디 하더라는 것이다. 한경직은 매일 그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웃을 사랑하려고 몸과 마음과 뜻을 다했다. 나는 한경직을 오늘도 생각하며 예수가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이다.

담임목사 2018-03-31 (토) 14:20
1. 기회있는 대로 학교를 세워
2. 신앙과 이성
3. 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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